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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한자 통일
글제목: [만물상] 한자 통일

연암 박지원은 1780년 연행길 선양(瀋陽)에서 하인에게 “뒷간에 간 것으로 해두라”고 이른 뒤 밤에 몰래 숙소를 빠져 나갔다. 그는 미리 보아 둔 가게에서 이틀 밤을 새우며 중국 상인들과 한자로 필담(筆談)을 나눴다. 그렇게 들은 골동 서화 감식법, 청나라 제도와 분위기, 상업예찬론들을 빠짐없이 ‘열하일기’에 기록했다. 중국어를 몰랐던 그는 길 가는 농부부터 한족 선비들까지 끊임없이 붙들고 필담을 했다.


▶연암이 현대 중국을 여행했다면 ‘열하일기’ 같은 역작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한자를 써 보여도 중국인들이 못 알아보기 때문이다. 중국은 1958년 문자개혁을 단행해 필획을 간편하게 줄인 ‘간체자(簡體字)’를 2200자 넘게 만들어 쓰고 있다. 문맹률 80%를 잡기 위해 공산당은 뤼신(魯迅)이 ‘아Q정전’ 서문에 주장했던 로마자 표기까지 검토했다가 한자 간편화로 절충했다. 정자(正字)는 번거롭다는 ‘번체자(繁體字)’로 낙인 찍혀 뒷방 신세가 됐다.


▶원자바오 중국 총리는 지난 4월 홍콩 초등학생으로부터 팬레터를 받고 친필 답장을 보냈다. 그가 답장에 쓴 한자가 번체자였다. 홍콩과 마카오, 대만은 정자를 쓰기 때문이다. 일본은 1946년 상용한자 1850자를 정하면서 약자(略字)를 많이 채택했다. 우리는 자전(字典)에 있는 약자와 일본 약자 일부가 혼용된다. 그래서인지 일본에선 그런대로 한자 필담이 통한다.


▶1991년 한·중·일·대만 학자들이 저마다 다른 자형(字形)을 지닌 네 나라의 공통 상용한자를 제정하자며 국제한자회의를 출범시켰다. 그간 별 소득이 없더니 지난주 베이징 회의에서 정자(正字) 중심으로 표준자 5000~6000자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간체자 체제가 흔들릴까봐 몸을 사리던 중국이 ‘간체자와 번체자의 화평(和平) 공존’을 내세우며 적극적으로 나섰다고 한다.


▶중국의 자신감은 어차피 간체자로 통일될 수밖에 없다는 확신에서 나온다. 세계에서 중국어를 공부하는 인구가 4000만명, 모두 간체자로 배운다. 3000개 대학이 중국어과나 강좌를 뒀다. 54개국 156개에 이르는 중국어 교육기관 공자학원도 계속 늘어난다. 유엔은 얼마 전 간체자를 정식 한자로 확정하고 내년부터 모든 중국어 문서를 간체자로 쓰기로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간체자 방어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본산지에선 사라진 한자의 원형을 우리가 지켜 가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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